“타스 예수(저분이 예수다)”로 시작된 세계 한센인 섬김의 길(본헤럴드 202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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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스 예수(저분이 예수다)”로 시작된 세계 한센인 섬김의 길(본헤럴드 2021.02.01)

ITMM 0 92 03.03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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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현옥철 목사((사)국제의료봉사회 ITMM대표, 라파플러스의원 원목), 우측, 최원영 대표(본헤럴드 대표, 본푸른교회 담임목사)

(사)국제의료봉사회 ITMM대표 현옥철 목사의 한센인 사랑

▶대담자 : 현옥철 목사((사)국제의료봉사회 ITMM대표, 라파플러스의원 원목)

최원영 대표(본헤럴드 대표, 본푸른교회 담임목사)

▶일시 및 장소 : 2021년 1월 27일 오후 2시, 국제의료봉사회 ITMM(라파플러스의원)

▶동행취재 : 윤홍식 편집국장

먼저 현옥철 목사님을 소개한 여러 유튜브 영상을 미리 접하며 많은 감동을 받았다. 목사님의 사역과 한센병에 대해서 깨닫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매년 1월의 마지막 주 일요일은 한센인의 날이어서 올해는 1월31일이 ‘세계한센인의 날’로 지켜진다. 이제 본헤럴드를 통해 한국교회에 목사님의 사역이 더욱 소개되길 바라며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한다.

Q1. 목사님께서 예수님을 믿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고등학교를 미션스쿨로 다녔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나?

A. 나는 모태신앙은 아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회 전도단이 학교 운동장에 와서 전도할 때에 교회 첫 발을 디뎠다. 그 시절에는 성탄절이나 부활절에 선물 받는 재미로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중·고등학교 시절 광주중앙교회에 정규오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계실 때 더욱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그러면서 고등학교에 가서 종교부장이 됐다.

Q2.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종교부장을 할 정도로 열정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다음 진로도 궁금해지는데 어떻게 됐나?

A. 학창 시절 교회 가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교회에서 활동하는 모든 것이 재밌었고 얻는 것도 많았다. 그러다가 추첨을 통해 미션스쿨인 광주숭일고등학교를 가게 됐다. 당시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어서, 학생회 간부나 교목실 눈에 들었다. 또 대부분의 임직원들이 우리 교회를 다녔다. 그래서 눈에 들어 종교부장을 맡았다. 그러다 보니 1800명의 전교생이 내 전도 대상이었다. 종교부장이 성경 점수에 영향을 줬는데 나는 학생들에게 내가 다니는 교회를 다녀야 점수를 줄 수 있다고 하면서 학생들을 교회로 많이 전도했다.

그렇게 학교에서도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당시 만 명이 넘는 성도였던 우리 교회에서도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나는 목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고3이 되어도 누구 하나 나에게 신학을 하라고 추천하거나 가이드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두 살 위 교회 선배에게 어떻게 하면 목사가 될 수 있느냐고 묻자, “신학교를 먼저 들어갈 필요는 없고 일단은 일반대학교를 나오고 그다음 신학대학원을 다니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 거기까지가 내가 받은 가이드 전부였다. 결국 난 전남대학교 공대를 갔다.

Q3. 공대생으로 졸업했다면 그 분야로 취업을 했을 텐데 일찍부터 전공과 상관없는 다른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상황이었나?

A.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다 보니까 보호받는 환경에서 공부를 못했다. 결국 원하는 대학을 못 가고 좀 늦게 전남대학교 공과대학을 입학했다. 학교를 다녔지만 공학도보다는 사업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졸업하고 웨딩전문지 월간 신랑각시를 발행하면서 웨딩포털 업을 했다. 호남권을 대표하는 사업이었다. 웨딩업이라는 게 토요일과 주일이 가장 바쁘다. 주일에 교회에 가고 싶어도 대표가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주일 저녁이나 평일 새벽에 피곤한 몸이지만 억지로라도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철퇴를 맞겠다’는 불안한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건설업을 하던 지인이 연대보증을 서달라는 것이었다. 별로 의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믿었던 사람이 부도가 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20-30억이 어음으로 돌아왔다. 결국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왔다.

현옥철 목사 ((사)국제의료봉사회 ITMM대표, 라파플러스의원 원목)

Q4. 그러면 그런 실패를 겪고 중국으로 간 것인가?

A. 1993년에 부도가 나고 서울 올라와서 1999년에 평신도 사역자로 살 생각으로 중국에 갔다. 평신도 사역을 생각했지만, 특별히 준비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개척교회 다니다가 하나님의 일을 규모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건설 중장비를 사서 100만 불짜리 회사를 만들고 중국에서 도로공사 사업을 맡았다. 돈을 엄청 벌었다. 당시에는 매 달 3억 이상 돈을 벌었다. 하지만 얼마 후 거기서도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했다. 중간 중개인 역할을 한 조선족이 중간에서 돈을 모두 빼낸 것이다. 하는 수 없이 20개월 만에 건설을 완성하고 건설 중장비를 처분해 결국 모든 것을 털게 됐다. 그런 후에 중국에서 의사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Q5. 중국에서 중의학을 배우고 통증의학 전문가로 전환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중의학을 배운 이유는 무엇인가?

A. 둘째 아이가 아토피가 있어서 만난 의사 선생님을 통해서 중의학을 배울 것을 권면받았다. 그래서 의사 면허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중의사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다니는 병원에서 중국 서안에 의료봉사를 가게 됐다. 거기가 한센인 마을이었는데, 김상현 의사 선생님이 거기에 계시다는 말을 들었다.

Q6. 그렇다면 그때 김상현 목사님을 만나고 한센병 환자에게 관심을 두게 된 것인가?

A. 그렇다. 그렇게 아내를 따라 의료봉사를 간 한센인 마을에서 김상현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2011년 그 해 처음으로 한센인을 접했다. 아직도 그 날의 일이 기억에 생생하고 그 날이 내 삶의 터닝포인트다.

오전에 식사를 마친 나는 병원 중앙화단에 한센인 할아버지 한 분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을 봤다. 유심히 보니 손목 아래도 없었고 발목도 없었다. 얼굴도 다 망가진 것처럼 보였는데, 이빨이 드러난 얼굴이 유난히 밝게 보였다. 그 얼굴이 내 눈에는 웃는 얼굴로 보였다.

뭔가에 끌린 듯 그분께 다가가 물었다. “할아버지 뭐가 그리 좋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나는 예수님과 함께 있어서 좋지” 하시는 것이다. “네?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데요? 그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어요?” 그러자 갑자기 할아버지가 “그럼. 있다마다. 같이 가자고” 하더니만 자기 팔로 내 팔을 감싸서 끌고 갔다. 내 팔을 낚아챈 할아버지의 팔뚝은 시신처럼 차가웠다. 불편한 자세로 끌려간 곳은 김상현 목사님이 계신 진료실이었다. 환자의 상처를 정성스럽게 치료하는 김상현 목사님을 향해 그 할아버지는 “타스 예수, 타스 예수” “저분이 예수야! 저분이 예수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내 가족도 친척도 버린 사람인데, 저 사람이 누구길래 나에게 이런 사랑을 베푸는가?” 그 말을 듣고 나는 숙소로 돌아와 펑펑 울고 말았다. 그것이 나의 중요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당시에 나는 ‘복음이 무엇일까?’ 분명치 못했는데 거기서 깨닫게 됐다. 복음은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신앙은 내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에 돌아와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2013년에 양재동 온누리 횃불트리니티 대학원대학교를 가게 됐고, 졸업하자마자 시험을 보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Q7. 그 후 구체적인 한센인을 위한 의료선교 사역이 시작된 것인가?

A. 그때부터 한센인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다. 나도 한센병에 편견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도 한센인에 대한 봉사는 왠지 꺼려졌다. 하지만 연구를 하다 보니 한센병은 낫는 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가 한국 자료도 봤다. 한국 한센인들은 98%가 복음화되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센인 복음화율이 98%라니. 어떻게 전도했길래 98%나 기독교인들이 됐을까?’ 그 이유는 한센인들에게 거리낌 없이 찾아와 준 선교사들과 희생적인 기독교인들 때문이다. 그들은 한센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그들과 함께 살았기에 삶으로 이미 복음화를 이룬 것이다.

Q8. 2014년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 바르구르 한센인 마을을 첫 방문 후 지금까지 매해 그곳을 방문해서 한센인들을 돌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바르구루 마을을 소개한다면?

A. 바르구르는 1975년 인도 정부가 한센인들을 모아서 관리하기 위해서 조성한 마을이다. 초창기에는 3000명이 넘는 한센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내가 처음 방문하였을 때는 360명의 중증 한센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상처를 보니까 아주 심각했다. 마을 중앙에 정부에서 운영하는 진료소가 있고 그곳을 오가는 공중 보건의와 간호사도 있었지만 정상적인 의료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한센인들을 방치하는 느낌이었다. 한센인들이 계속 있어줘야 자신들도 지속적으로 국가의 예산을 배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눈에 한센인들을 돌보며 치료하고 약을 나눠주는 우리들이 반가울 리 없다. 처음에는 150명씩 진료를 받았다. 그때 어떤 환자가 약을 복용하고는 처음으로 잘 잘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약을 더 얻을 수 있는가?’ 물었다. 나는 바르구루 마을에서 현지 목사로 있는 다니엘 목사에게 이 약을 맡길 테니 약이 필요하면 교회를 찾아가라고 말했다.

6개월 후에 두 번째 갔다. 이번에도 마을 진료소 의사가 어서 철수하라고 했다. 나는 젊은 의사를 불렀다. 나는 그 의사를 설득했다. “당신은 여기서 평생 있을 건가? 당신은 이 병이 낫는 병이라고 생각하는가? 여기 한센인들이 이 병에서 다 낫는다면 누가 유명해지는가? 우리가 앞으로 병원을 크게 지을 계획인데 그때 네가 병원 원장이 될 수도 있다.” 그 후부터 그 병원 의사가 적극적으로 나를 도왔다. 나는 마을의 한센인들에게도 말했다. “당신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교회 와서 담임목사의 말을 들으면 여러분에게 자립할 수 있는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다녀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니엘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들이 다녀간 후 마을 한센인들이 다니엘 목사에게 ‘한센병이 정말 낫는 병인가?’ ‘또 어떻게 하면 낫는가?’ ‘그때 왔던 한국 사람들은 다시 오는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믿을 수 있는가?’ 관심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나는 바르구르를 방문할 당시 마을 진료 공간으로 사용했던 중앙 공터에서 예배드릴 것을 제안했다. 그 이후 마을 입구에 있는 중앙 공터에서 예배가 시작됐고, 다니엘 목사의 마을 출입도 부드러워진 것이다. 처음에는 예배에 두 명, 다섯 명, 아홉 명 모였는데 그 숫자가 40명 남짓 불어나더니만 이제는 140~150명이나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우리는 마을 한센인들의 생계 자립을 돕기 위해 염소 한 가정에 암수 한 쌍씩 사줬다. 나는 염소가 새끼를 낳고 또 번식할 때까지는 손대지 말 것을 약속받았다. 염소가 한 마리 새끼를 낳으면 한 달치 월급에 해당된다. 열여섯 마리로 시작된 염소가 이제는 200여 마리로 증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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